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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71회

안동일 작

노익장의 마지막 전투

사흘 뒤 고구려군은 일부병력을 영단성에 남긴 채 평양으로 개선했다. 쾌차하지 못한 대창하는 말에 오르지 못하고 급조한 마차에 누워 고구려 새 강역을 종단해야했다. 아비의 손을 잡고 눈물 얼어 말라붙은 눈을 비벼가며 60여 년 전 걸었던 그 길을 호사한 금장마차에 누워 돌아온 것이다.

대창하는 흑수말갈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1년 가까이 집안에서 정양을 했으나 몸에 퍼진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그만 세상을 떠나야 했다. 대창하는 장수왕이 병문안 차 그의 집을 방문했던 날 왕이 돌아간 직후 세상을 떠났다. 왕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진아 네가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될 법이나 한 소리냐?” 왕이 눈가에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대창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친근한 하대였다. 아진이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왕도 반말의 하대를 하지 않았었다.
“마마, 황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이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놀랄 만큼 비쩍 마른 대창하가 자신의 마른 손을 왕의 손에서 빼내려 하면서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저보다 연로한 마마께서도 이리 강건하신데 제가 이리 자리보전하고 있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다 내가 욕심이 지나쳐 자네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을…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동무들을 다 먼저 보내는 그런 아픔을 겪고 있는 터에 자네마저 이리 누워 있게 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야말로 마마의 은덕으로 사람답게 살았습니다.”
“사람답게 살았다?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여한이 없습니다.”
사실 왕이 하사한 탕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된 측면이 있었다. 백선근 열탕이 만독에 유효하다고 했지만 화살 전갈독에는 오히려 안 쓰니만 못했다. 독의 내성을 더 키우는 작용이 있었던 것이다.

아진이 독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어 귀환하자 왕은 전의에 명해 탕재를 짓게 했는데 그게 오히려 천려일실이 되었던 것이다. 아진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왕은 너무도 노해 전의를 귀양 보냈고 목숨이 부지 된 채로 압송된 라운의 아들 노티몰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소의 왕답지 않게 가차 없는 처사였다.

왕이 다녀간 건흥 65년, 서기 478년. 10월 17일 날 아진은 모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옷을 갈아입겠다고 나섰다.
그가 고른 옷은 조의선인의 새 의복. 새로운 모습이 된 아진은 두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더니 이윽고 신선처럼 이승을 떠났다. 입가에 그림처럼 매달린 웃음은 그가 인생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는 커다란 깨우침을 얻은 채 갔음을 말해주었다.

하늘 위로 대창하와 장수왕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광경이 구름처럼 펼쳐졌다.
“아진, 나는 너의 무엇이었더냐?” 장수왕의 물기어린 물음이었다.
“대왕께서는 제가 평생 뒤따라야 했던 큰 뜻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아진이 진심을 담아 답했다.
“나는 네게 한낱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더냐?”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강요로 제게 등을 따라오라 이르신 적이 없으십니다. 제가 원해 그리 했지요.” 대꾸하는 왕의 음성은 차라리 애달픔 이었다.
“내가 그럴 만한 왕이었더냐?”

“물론입니다, 마마. 제 평생 다른 무엇보다 사는게 중요한 것을 일러준 것은 아비였으나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쳐주신 것은 마마이십니다. 같은 땅의 인간 모두가 한형제요, 한백성이라는 대왕의 가르침이 저 대창하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저는 인생이 그저 태어나 먹고 죽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죽는 것 이외에?인생에 더 무엇이 있다더냐?”
“있습니다. 분명코 있습니다. 마마의 사해동포론, 그리고 통합의 역사관 그리고 다물의 정신을 추구하는 그 자세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을 사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한평생은 장수왕과 더불어 사해동포,?중원을 제외한 요동 강역의 땅을 밟고 선, 장백의 얼을 받은 모두가 한백성인, 그리고 그 백성이 서로 위하고 아끼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진했던 삶 아닌가. 비록 그 결과를 직접 보진 못했으나?목표를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온 삶이었다.
“그래서 대왕은 삶의 목표를 주신 제 동기간 형제이십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장수왕이 가볍지 않은 눈빛을 가득 담아 대창하의 손을 쓸었다.

“그래, 그래. 네가 있어 나도 복된 삶을 살았구나. 내 생각을 잘 이해하고 받들어 주는 너 같은 형제가 있었기에 나도 기뻤고 더 열심일 수 있었다.?비록 지금 눈 앞에서 우리가 같이 만들어가던 세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생각이란 이어지지 않겠느냐? 너와 내가 못 이룬 꿈은 생각으로 남아 백성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에게 이 전승이야 말로 다물이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그만 쉬거라 나의 형제 아진아.”

대창하 구름이 만족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확신이 서려있는 미소였다. 그렇기에 저토록 화사하게 퍼져 나갈수 있음이었다. 자신의 대씨 문중이 이 땅에 남아 사해동포, 홍익인간이란 고구려의 기개를 다시금 떨칠 것이고, 자신이 신명으로 좇았던 장수왕의 치적과 철학은 천년을 넘어 회자되어 칭송되게 될 것을…(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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