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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68회

안동일 작

노익장의 마지막 지두우 전투

아진에게는 그들 뿐 아니라 흙탕물에서 허우적거리다 화살에 맞아 숨져가던 젊은 병사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도 물에 빠진 동무들을 건지겠다고 뻘밭에 들어가 손이며 창을 내밀다 자신도 진흙에 미끄러져 빠져가면서 돌무더기 우박을 맞아 쓰러져 가던 병사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작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를 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거늘 이건 작전도 아니었고 전투도 아니었지 않느냐?”

“그래도 종국의 승리는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젊은 참모장의 확신 어린 말에 창하가 한숨을 섞어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틀림없습니다.”

“이만한 피해를 이미 보았는데도 말인가?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가?”

참모장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장군님과 함께한 전투에서 우리 숙신군단이 패한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렇듯 그에게 굳건한 신뢰를 보여준다는 게 고마웠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나를 위로하는군. 요즘 부쩍 전투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그게 맞는 것 같아” “무슨 말씀이신지?”

“전투는 정성이 하는 일 인게야. 고양이도 쥐 한마리를 잡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다지 않던가.”

오늘 전투는 아진답지 않게 성급했고 무모했었던 게 사실이었다. 진군하던 공성차가 갑자기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 땅속으로 꺼질 때는 심장이 꺼지는 것 같았다. 아차 싶은 마음은 순간이었고 무언가가 후려치는 듯 정신이 번쩍 났었다.

어째서 잊고 있던 것일까. 흑치 사범도 그랬고 용노사도 그랬다. 그리고 장수왕도 그랬다. 아진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세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예와 전투 그리고 인간사에 있어서의 정성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순간의 자만과 성급함이 엄청난 패해를 가져 왔던 것이다. 종국에는 승리할 전투에서의 작은 패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잃은 그리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병사들에게는 오늘의 일이 그저 작은 패배만으로 남게되지는 않을 터였다. 대창하는 이번 전투에 임했던 자신의 심경을 되돌아보았다. 투지가 일지 않았다. 말하자면 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뭐 어떻게 되겠지’하는 막연하고 안이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다르다 해도 결코 장수가 취해서는 안 될 자세였었다.

눈을 감고 회오에 잠겨 있던 대창하는 잠시후 눈을 뜨고는 참모장과 부장들을 불러모았다.

“자 승패는 병가지상사라 했다. 이번 패배를 교훈 삼아 진부장 말대로 종국의 승리를 위해 분발하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잘못된 작전은 빨리 잊을수록 좋았다. 장수가 패배에 연연해 맥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만이나 되는 고구려군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

“공성차는 몇 대가 손실되었는가?”

“4대가 수렁에 빠져 버렸습니다. 아직 6대나 남아있고 또 벽차 수레는 금방 공성차로 전환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오늘 보았듯이 저들의 대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제장들도 느꼈을 것이다. 아무래도 완전한 함락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생각들이 있으면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토록.”

그 말에 여진 군단에 배속 돼 있는 몇 안 되는 구루인 천부장 아돈이 썩 나섰다.

“어차피 정공법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방패차를 앞세워 전진한 뒤 해자를 메우고 공성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부장들도 질세라 의견을 냈다. 아직 기개가 꺽이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여우를 잡으려면 여우를 굴 밖으로 유인하라 했습니다. 어떻게든 적을 성밖으로 유인해서 결판을 내는 게 상수인 듯 싶습니다.”

“장기전으로 간다해도 우리가 불리할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적들은 평원에 고립돼 있는 형국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위나 동부여며 백제잔당의 움직임도 신경을 써야 할 듯 싶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참모장 귀성준이 말했다.

“어쨌든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병사들의 사기는 높습니다. 한번 패했다고 해서 물러설 숙신군단이 아닙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대창하가 좌중을 한번씩 뚫어지게 바라본 뒤 힘주어 말했다.

“그래. 오늘은 이 곳에서 숙영을 하고 내일 아침 다시 공격에 들어간다. 오늘 저녁은 병사들에게 특식을 제공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대창하는 물러나려는 부장들 가운데 정효를 불렀다. 정효는 아진에게도 친척이 되는 젊은 무관이었다. 정효의 할아버지가 아진과 함께 호태왕 숙신정벌 때 고구려로 함께 온 사르무후 출신 인척이었다.

“무슨 분부이신지?” “자네가 성에 한번 들어갔다 와야겠다.” “성이라면 저 영단성 말입니까?” “그래, 마지막으로 설득을 한번하고 싶어서 그러네, 어차피 저쪽이나 우리나 대부분 혈연으로 맺어진 사이인데… 무고한 희생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더 바랄 일이 없지.”

“지금 와서 설득이 되겠습니까?”

“물론 가능성은 낮지, 하지만 정성을 다하고 싶어서 그러네.”

“예, 알겠습니다. 어떻게 준비를 하면 되는지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정효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내가 편지를 한장 써줌세. 그걸 라운의 아들에게 전해주게 그리고 답을 듣고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대창하는 시위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 이르곤 벌판 평상 위에서 편지를 썼다. 정효와 시위병은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놀란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붓과는 거리가 먼, 그리고 제대로 경당이나 태학에 제대로 다닌바 없는 이민족 출신 무인이 국서에 버금가는 서한을 쓰는데 순식간에 일필휘지로 써대는 놀라운 장면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글을 제대로 모르는 정효나 시위병이 보기에도 대단한 필력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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