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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연재 67회

안동일 작

노익장의 지두우 전투

무척 힘이든 일이었지만 보병들이 숙달된 솜씨로 적절히 교대해 가면서 일을 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갈대밭 늪지대를 벗어났을 때 고구려군의 오른쪽 평야에서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갈대 벌판에서 새벽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병장기며 갑옷에 반사되는 빛이 사방을 번쩍이게 했다.

장엄한 광경이었다. 사위가 환해지면서 대창하의 군은 잠깐 놀랐다. 엊저녁 아스라이 보였던 평원의 천막 부락이 밤 사이에 없어진 것이다. 저들도 고구려군의 진군을 알고 있어 밤사이 피했다는 얘기였다. 사방이 트인 평야 지대였기에 매복을 염려 할 필요는 없다지만 하룻밤새 적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은 충분한 위협거리를 남겨놓았다.

“어떻게 할까요? 장군.”  참모장이 물어왔다. 그의 손에는 군도가 펼쳐진 채 들려 있었다. 말 위에 앉아 있던 대창하가 군도를 넘겨받아 훑어본 뒤, 이내 무심한 어조로 작전 명령을 내렸다.

“그냥 진군이다. 어차피 적들은 우리가 도로가 있는 좌측으로 올 것으로 예상하고 그 곳에 대비를 했을 것이다. 웅고로라고 했던가, 영단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 이름말일세.”

“예, 그렇습니다. 영단까지 그 곳 말고 이렇다 할 부락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예정대로 웅고로를 거치지 않고 영단으로 직접 간다. 수고스럽겠지만 초원을 헤치는 작업을 더 독려하도록.”

“예, 알았습니다.”  이때 창하가 타고 있던 말이 저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한번 흔들더니 ‘으흐흥’하고 힘찬 울음을 울었다.

대창하는 안장 위에서 무릎을 약간 조였다. 앞으로 나가자는 신호였다. 오늘 따라 연추의 상태가 유난히 좋은 듯했다. 발걸음도 경쾌했고 고삐를 사용하지 않아도 그가 전하는 허벅지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주인의 뜻을 알아챘다. 연추는 왕이 하사한 애마 혈혈노가 수명을 다하고 죽은 뒤 마다산 목장에서 구한 말이었다.

처음엔 암말이었기에 다소 망설였지만 지내 볼수록 기특한 말이었다. 암말 특유의 지구력에다가 숫말 못지 않은 용맹도 갖추고 있었다. 연추와 함께 누빈 전장의 수효가 벌써 연추의 나이 세 곱절에 이른다. 연추도 18살이 되었다. 전투말로서는 환갑을 지낸 셈이다.

기병에게 말은 그 어떤 병장기보다 중요했다. 숙신군 기병이 고구려 최강을 자랑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좋은 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군 시절 아진은 용노사에게 말 고르는 법과 기마술을 배운 이래 좋은 말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아 왔던 터였다.

좋은 말은 털에 윤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눈이 맑고 생동감이 있어야 한다. 귀를 자주 움직이는 말은 겁이 많다. 여름엔 땀을 많이 흘려야 한다. 걸을 때 보폭이 일정하고 탄력이 있어야 한다. 발을 가볍게 뻗어야하고 뒷발이 끌리는 듯하면 좋지 않다. 어린 시절에 배가 불룩하다면 결코 좋은 말로 성장할 수 없다.

전투마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겁이 없어야 한다. 말은 워낙 예민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다. 말에게 겁을 없애고 용기를 북돋는 훈련이야말로 전투마로 키우는데 있어서의 관건이었다. 때문에 숙신군단의 훈련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강도와 격렬함으로 유명했다.

잔도를 헤치고 고구려군 1만이 영단성이 보이는 곳까지 진출한 시각은 저녁 해가 뉘엇뉘엇 지는 무렵이었다. 백리 가까운 초원의 늪지대를 하루 만에 주파했던 것이다. 영단에 가까워지면서 고구려군은 우람한 성을 보고 놀랐다. 고구려군 중에 영단에 와 본 사람은 없었다. 그저 풍설로만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고 들었을 뿐 이렇게 웅장하게 성이 꾸려졌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고구려의 옛 도읍인 졸본성 정도의 규모는 돼 보였다. 성 아래 마을이 옹기종기 있었는데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두 소개시킨 모양이었다. 중간에 장애는 없었다. 초원지대 양쪽으로 간간히 천막 마을이 보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놀랍습니다. 장군.” 여진 출신 부장 한사람이 창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창하는 진작부터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런 초원 지대에 저 우람한 성을 세우려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따랐을까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대로 부숴 없애기엔 그 수고가 안타까웠던 탓이었다.

“대단하구먼.” 창하도 한마디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저 성을 함락시켜야만 하네. 그게 우리의 임무이자 운명 인게야.” 저도 모르게 비장한 노인의 어조가 되어 있었다.

일찍부터 공성전이 시작됐다. 성안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성곽 위 망루 위에 초병들이 있기는 했지만 크게 동요하거나 놀라는 기색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하는 군사들이 숨도 돌리기 전이었지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의 태세를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시위이기도 했으며 적의 사기를 꺾고 기선을 제압하려 했던 것이다.

뿔고동과 징이 울고 공성차를 앞세운 고구려군이 거리낌없이 함성을 지르며 성으로 몰려갔다. 고구려군이 성 가까이까지 갔는데도 성위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맨 앞의 공성차가 성곽 오십보쯤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땅이 꺼지더니 공성차와 병사들이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 첨벙하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함정이다.” 공성병들이 빠지면서 소리쳤다.

“전군 정지.”  “정지하라.”  부장들이 소리쳤지만 벌써 적지 않은 군사들이 땅위를 살짝 덮어놓은 함정에 빠져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성에서 방포 소리가 울리더니 화살과 돌덩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해자 흙탕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려던 군사들이 화살에 맞고 돌에 머리를 맞아 쓰러져 갔다.

물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살을 에는 듯 차가웠고 해자 주변이며 둔덕이 온통 살얼음 낀 진흙 밭이었기에 기어나오기도 용의치 않았고 몸의 중심을 잡고 서기도 불편했다. 적지 않은 피해를 봐야 했다. 횡대로 전속 질주했기 때문에 돌이키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성에는 해자까지 파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자로 80자쯤 되는 엄청난 규모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해자가 성곽 둘레에 있었다. 흑수군은 그 해자 위에 헝겊이며 짚단 따위로 살짝 덮은 뒤 흙을 뿌려 위장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일시에 성곽위로 올라서던 흑수군의 수효였다.

언제 성곽이 조용했냐는 듯 벌떼 같은 병사들이 활이나 투석기를 들고 교대로 성위에 올라섰는데 그 숫자만 해도 원정 온 고구려군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창하의 고구려군은 성곽 오리쯤 되는 곳으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해야했다. 7백 가까운 군사를 순식간에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언제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던가. 백전의 노장군이 된 대창하의 얼굴에 후회과 자괴가 어렸다.

“장군,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직 주력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자책의 상념에 잠겨 있는 창하에게 참모장이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엄청난 불찰이었다. 내 저들의 부모들을 어떻게 본단 말이냐?”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흙투성이 피투성이의 군사들 쪽을 보면서 아진이 대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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