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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역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제13회

 안동일 작

 니르아이신 환생 전말 

선생의 유고에는 우리 역사를 빛낸 백인 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단군왕검으로 시작해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이르는 대개 우리가 아는 위인들이 선정돼 있었는데 그들의 약사며 업적을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그 글이 씌어 졌던 60년대 초반의 역사 사전이나 백과사전을 참고 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 들에 대한 내용이 크게 다르거나 고개를 갸웃하게 할 부분은 없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바로 만주족 거란족으로 분류되던 영웅들을 대거 포함시켰던 것이다. 물론 누루하치도 들어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요나라를 세운 아율아 보기 까지 우리민족의 100대 인물로 선정해 놓았던 것이다.

우리의 기존 지식에서 우리민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인물은 10명이 넘지 않았는데 대조영을 도와 발해를 건립한 걸사비우, 야울아보기의 아버지인 아유소,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이지란 등이 들어 있었다.
니르아이신, 대창하는 100대 인물에 들어 있지 않았다. 유고 가운데 대창하가 언급된 부분은 쥬신 만주사 서언 부분에 멀리 고구려 장수왕 때 숙신의 지도자로 왕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운 만주족 출신 장군이 있었는데 그의 만주 이름이 니르아이신, 왕이 하사한 이름이 대창하 였다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태창하의 지석 탁본은 선생도 전문 해석 하지는 않았던 듯 싶다. 워낙 훼손이 심해서 아예 포기를 했었는지 아니면 큰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 했던지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내 안목의 지평을 넓힌 선생의 유고를 그냥 묻어 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먼저의 출판사가 아닌 다른 출판사를 찾아 그곳 편집장에게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특히 쥬신 만주사 부분이라도 한번 검토해 달라고 부탁해 놓았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지석 탁본은 중문학을 전공한 조카에게 해석을 맡겼다. 중문학과 지석 해석은 전혀 다른 분야 라면서 그는 난색을 표했지만 내 우격다짐과도 같은 종용과 재촉에 영 자신 없어 하는 표정으로 달포 만에 해석문을 들고 왔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는 선배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A4 용지 반장 분량의 워드프로세서로 쓰여진 짧은 글로 대창하장군은 내 앞에 홀연 나타났다.
여진인 이었으나 고구려인으로 살았고 종국에는 누구보다 강한 고구려인이 되었던 인물. 그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었던 아니었던 간에 천 5백년전에 이미 동북아의 역사, 이지역의 민족 문제며 연대라는 명제를 온몸으로 안고 살았던 5세기의 국제인 대창하, 니르아이신이 우리 앞에 황토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시 고구려로로 돌아가서…

 

4. 운명의 조우

-동방을 이(夷)라 부른다. 이란 저(柢)를 뜻하는 것으로 어질고 생명을 좋아해서 만물이 뿌리를 박고 태어 난다는 뜻이다. 이들은 천성이 유순하여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기 쉽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75)-

“정말 영락대왕 마마 대단한 기라, 저 만큼 언덕에서 한번 고함을 지르니까 이쪽 성 전체가 흔들려 뿌리는거 아니가.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데 우짜겟노? 성주며 장군들이 와들와들 떨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기라. 납작 엎드려 처분만 바라는 거지, 내야 제일 먼저 한달음에 가우리 진영으로 달려가 대왕 마마 앞에 넙죽 절하고 나서 가우리 사람이 된기라. 한번은 말이다….”
주돌 이라는 영주 출신 신참 인부의 허풍 섞인 무용담이 또 시작된 모양이다. 그의 말에는 그곳 동부여 억양이 그대로 베어있었다.
양차 석도강에 인부들이 더 배치 됐다.
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동부여 정벌로 영락 대왕은 고구려의 땅을 거의 크게 넓혔고 자신의 신민을 거의 두 배로 더 늘였다.
주돌이란 인물도 그 전투에서 귀순한 동부여 사람으로 그쪽에 있을 때도 석수 일을 했다해서 석도강에 배치된 인물인데 허풍이 좀 있어서 그렇지 입심 좋고 또 손재간도 좋아서 입부들의 인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점심시간이 끝나 잠시의 휴식을 틈타 또 그가 인부들을 모아 놓고 이바구를 시작한 참이었다.

영락 20년, 그러니까 아진 등 국내성 백성들이 크게 감동했던 서기 410년 10월 동맹 제전 직후 혹한을 무릅쓰고 영락왕이 단행한 동부여 정벌은 따지고 보면 영락왕의 정복 사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고 실속 있는 정벌이었다. 또 이 정벌은 영락왕의 마지막 대규모 정벌이기도 했다.
어찌된 셈인지 후세의 사가들이 이 정벌을 크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동부여가 따로 완전한 국가의 형태로 따로 존재하고 있지 않았고 중국의 사서들이 자신들의 관점으로는 워낙 변방의 일이라 제대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부여란 명칭은 다른 사서에서는 설화로만 나와 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고 후일 세워진 호태왕 비의 비문에서 처음 나왔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정벌의 성과를 다룬 비문의 내용 까지도 제대로 해석 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부여란 한마디로 말해 연해주까지 포함하는 쥬신반도(한반도) 동북부 지역 전체를 총괄하는 지명이었다. 당시 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부여(북부여)의 동남쪽을 일컫는 것이다. 고구려가 부여족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부여라는 명칭에 익숙했고 또 부여라는 국가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자연스레 쓰여진 호칭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시절 그 지역의 국가는 남옥저와 예, 그리고 신라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진한국의 후예들의 부락과 성이었다.
옥저는 그 백여년 전 쯤에 북연에 패망했는데 그때 옥저의 왕족과 후예들이 동해를 따라 반도 로 내려가 세운 국가가 바로 남옥저였다. 남옥저는 한나라의 직할 4군의 하나였던 진번을 몰아냈던 지역 호족들과 연합해 나라를 세웠고 그 일대의 대소 부락 국가들과 연맹을 맺고 있었는데, 짐작 할 수 있는 그대로 강성한 국력이나 군사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백전불패의 고구려 강병을 거느린 광개토대왕의 대규모 출정에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루지 못하고 지리멸렬 하면서 복속해 왔던 것이다. 그때 태왕이 획득한 성이 무려 64개소 촌락이 1400개소에 이르렀다. 대단한 영토와 세력 확장이 아닐 수 없다. 이 전과는 호태왕비 비문에도 적혀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둘러싼 큰 오해가 있다. 이 동부여 정벌 사업이 태왕의 가장 마지막 사업이었기에 비문 정복 부분 맨 마지막에 적혀 있는데 이 동부여 지역만의 64개성 1400촌이란 숫자를 대왕 정복 총결산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태왕의 업적을 축소 왜곡 하는 잘못된 해석이다. 영락 6년의 백제 정벌 때만 하더라도 58성을 점령 복속했다고 나오는데 64성이 호태왕의 총 전과라면 동부여 정벌에서 6성만 얻었고 기타 나머지 무수한 정복에서는 아무런 성도 획득하지 못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호태왕과 비문을 적은 총신들이 벌떡 일어나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비문에 적혀있는 성(城)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 하느냐가 관건이지만 당시 촌락은 20-30호가 고작이었고 50호 정도가 넘으면 토성이나 목책을 쌓았는데 전공(戰功)을 다룰 때는 이를 모두 성이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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