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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연재소설> ‘구루의 물길’ – 연재 47회

안동일 작

 
 도도히 흐르는 사랑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서옥제라는 고유의 결혼 풍습이 있었다. 혼인이 결정되면, 신부의 집에서는 자기 집 뒤에 조그만 집(서옥-사위의 집)을 짓는다. 사위될 사람이 저녁에 신부의 집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앉아서 신부와 함께 자겠다고 간청한다. 간청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면 신부의 부모가 비로소 허락하고 서옥에서 자게 한다. 이 때 신랑은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이렇게 혼인을 한 후 아이를 낳아 아이가 크게 자란 후에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의 집안이 훨씬 우위에 놓인 결혼제도이다.>

 

춘삼월이라 했지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강물이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게절의 변화를 알고 물이 오르기 시작한 버드나무들이 강 물결에 떠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도도의 가까운 곳에 그 사람이 있는가?”
아진이 자신의 곁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도도에게 물었다.
“네, 그런데 그 사람은 모르고 있지요.”
“그래?”
아진은 강가에서 도도의 사랑 고백을 받고 있는 것이다. 왕의 측근으로 승승장구하던 아진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잃은 듯 한 순간에 아진은 사랑을 얻고 있는 중이었다.
도도는 아진이 국내성 가산에서 석수 일을 하던 소년 무렵부터 그의 곁을 맴돌던 깜찍한 여진 소녀, 바로 그 소녀였다.
이제 나이 서른에 달한 도도가 지금 아진에게 자신이 20년 가까운 세월을 품어온 흠모와 사랑을 고백 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도는 자신이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곁에 있음에도 그 사랑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진으로서는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 할 만 했다. 놀랍기는 했지만 대뜸 그랬냐고 그녀를 다독일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아진으로서는 그런 사랑 고백에 귀 기울일 그런 여유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조마조마 했었는데 그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여진 군단을 이끌던 중추 라운과 막고가 부대를 이끌고 흑수로 탈주한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라운과 막고는 늘 아진에게 불만을 터뜨리면서 고구려의 2등 백성으로는 만족 할 수 없으니 동족의 품으로 달려가자고 성화하곤 했었다. 아진의 진지한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어치피 흑수에 합류 한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한족과 선비족의 이용물 밖에 되지 못한다는 아진의 설득은 그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라운과 부대의 탈주는 그대로 아진의 책임으로 돌아 왔고 그동안 아진을 탐탁치 않게 여겨 왔던 그의 정적들은 아진을 참수해야 한다고 까지 나서고 있었다. 왕을 비롯해 아진을 아끼는 중신들이 나서 아진의 그동안의 숱한 공적을 들어 직위가 해제 되고 사저에 근신하라는 선에서의 처분으로 일단락 지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아진은 정상을 찾지 못하고 생활은 엉망이 되어야 했다.
사건이 난지 보름이 지났다. 사건 직후 아진은 사흘 내내 병부에 소환돼 추궁과 닦달을 당해야 했고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랬는데 오늘 오전 도도가 사저로 찾아 왔다.
도도 역시 여진 군단에 속해 있는 여 부장이었다. 자신은 군대와 결혼 했다면서 한다하는 할라(부족)내 혼처들을 모두 물리치고 독신을 고집하고 있었다.
평소 아진도 도도를 일가 조카쯤으로 대해 왔고 어려서처럼 도도는 아진에게 유난히 따르면서 스스럼없이 대해 왔었다.
도도의 명랑함과 씩씩함은 여진 군단의 자랑거리였다. 도도는 말타기와 자고 던지기에 능했다. 지난번 백제와의 한산성 전투에서도 남자 부장 못지않은 공훈을 세웠고, 신라와의 실직성 전투 때는 신라의 화랑 연수랑을 생포하는 용력을 보이기도 했었다.
도도는 아진에게 답답하게 집안에만 있지 말고 강가로 산책이나 나가자고 졸랐다. 아진은 죄인의 몸으로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장군이 무슨 죄인이냐고 하면서 성화를 부리는 통에 못이기는 채 하고 따라 나섰던 참이었다.

“그 사람은 저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도가 다시 그 사람 얘기를 해 왔다.
“그래 도도 네가 워낙에 씩씩하고 쾌활하기 때문 아니겠느냐?”
“제게 소원이 있다면 그 분에게서 여자로 대접 받으면서 다만 며칠이라도 지내는 것이죠.”
“여자로 대접 받고 싶다?”
도도의 꿈은 야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진으로서는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인 이상 왜 도도의 뜻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진은 무미가 다시 생각났다.
그 활달했던 그리고 아진의 내조자로서는 적격이었던 무미가 세상을 떠난 것은 벌써 3년전이었다. 옛 옥저 지방에 나들이 갔다가 그곳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됐던 것이 탈이었다.
약 한첩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만 요절 했던 것이다. 사내아이 둘을 남긴 채 였다.
무미의 죽음은 왕도 애석하게 여겨 아진을 따로 불러 직접 위로 했던 일이기도 했다.
“다 제 복 아니겠느냐? 이제 살만하니까… 쯧쯧 다 무미의 남다른 호기심이 탈 이지. 복생이 요리를 잘못 먹었다고 그랬더냐?”
그날은 왕도 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 기회 있을 때 마다 왕은 장수가 나라 일을 충실하게 하려면 가정이 튼실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새 장가 드는 문제를 꺼내곤 했다.

하지만 아진은 특별히 여인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 일도 바쁘고 해서 그 문제는 신경 쓰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아들 둘이야 유모며 집사들, 그리고 아진의 부친인 먼타이가 잘 돌보고 있어 탈 없이 자라고 있었기에 큰 걱정은 아니었다. 또 집안이나 근무처에서 여인네가 해야 될 내조의 일은 몇 년전 위나라에서 함께 돌아온 말갈 여인 호영과 지금 옆에 있는 도도가 적절하게 처리해 주고 있엇다.
하기는 호영과의 관계도 명확하게 정리해둘 필요가 있는 일이기는 했다. 무미가 살아 있을 때 부터 두사람이 어떤 말을 어떻게 나눴는지 호영은 아진의 첩실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무미도 이를 은근히 부추키는 듯 했지만 호영의 재주와 여자답지 않은 용력, 그리고 갖은 경험은 집안에 놔 두기에는 너무 뛰어 났다. 또 그것 보다 자신이 충심으로 따르는 주군 왕이 일처에 만족 하고 있기에 첩실을 둔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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