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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 이민현장 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77회

안동일 작

 러시아 볼로이의 저택

보로이는 거실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내에는 시중을 드는 하인들만 있었을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처럼 보로이와 단둘이 있게된 셈이다.
보로이가 권하는 대로 북극곰의 털이 푹신한 장의자에 앉았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 갖고 있네, 브라더.”
보로이가 떠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이런 시간도 있어야지요, 알렉세이.”
장의자에 펼쳐진채 놓여져 있는 영어 회화책을 보면서 빌리는 빙긋이 웃었다.
“오늘은 우리집에서 단출하게 두사람만의 저녁을 하면서 얘기를 좀 했으면 해서…”
“그렇지 않아도 하도 나를 뱅뱅 돌려서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는데 아주 잘 한 일이요, 아브구스트.”

보로이의 별명이 아브구스트 였다. 아브구스트는 8월이란 말이었는데 알렉세이 보로이의 생일이 8월이어서 였는지 아니면 러시아에서 그나마 따뜻한 계절이 8월이어서 였는지 그의 친구들은 보로이를 그렇게 불렀다.
하녀가 쟁반에 러시아 홍차와 브랜디 그리고 딸기잼을 날라왔다. 빌리도 보로이와 이반이 하는대로 브렌디를 섞은 차를 마시면서 간간히 포크로 잼을 떠서 먹었다. 독특한 풍습이었다.
빌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 했던 보로이의 눈이 반짝 빛나면서 TV 화면에 고정 됐다. 화면에는 놀랍게도 페트리샤 엔더슨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빌리도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주시했다. 붉은 광장의 설경을 배경으로 모피옷을 뽐내는가 하면 스튜디오에서 야회복을 뽐내기도 했고, 청바지와 티셔츠의 활달한 모습을 비추기도 했다. 모스크바 방송에서 마련한 페트리샤등 미국모델 특별 쇼인 모양이었다.
이반이 뭐라고 러시아 말로 크게 떠들어 댔다. 공항에서 만났던 빌리가 잘 아는 여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보로이가 뿔테 안경속의 작은 눈을 크게 뜨고 빌리를 쳐다봤다.

호텔로 몇번이고 페트리샤가 연락을 해온것 같기는 했다. 한번은 방송국에서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고 했고 한번은 무슨 프로덕션에서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빌리가 묵고 있는 메지두나 호텔은 일종의 멤버쉽 호텔로 일반에게는 개방이 되지않는 특수 호텔이었기에 페트리샤가 연락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을 터 였다. 빌리는 그녀의 연락처를 받기는 했어도 보로이가 짜 놓은 일정이 워낙 빡빡 했기에 그녀에게 전화를 할 틈이 없었다.
“야 빌리 너는 어떻게 미국에 잘난 여자들은 다 알고 있냐?”
보로이가 시쿤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주 업종이 패션이라는걸 몰랐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멋진 여자들과 함께 있어 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아브구스타 답지않게 무슨 소리 합니까? 러시아에도 미인이 즐비 하던데…”
“모스크바 촌닭들과 같은가 어디…”
“그럼 오늘 저 모델 만나볼래요? 알렉세이.”
“정말?”
보로이의 눈이 더 커졌다.

“어차피 내일 아침엔 모스크바를 떠나기로 돼 있으니까 오늘 밖에 시간이 없네요, 연락을 한번 해 봅시다.”
페트리샤와의 연락은 어렵지 않았다. 방송국에 한번 해보고 프로덕션에 한번 했더니 이내 그녀의 소재가 파악 됐다. 보로이의 힘은 그런데 있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은 페트리샤는 상대가 빌리임을 알자 뛸듯이 기뻐했다.
“미스터 챙 얼마나 연락을 했었는데요.”
“워낙 바빴어야지, 지금 중요한 사람들과 함께 있나?”
“왜요? 지금 시간 내실 수 있으세요? 얘기하고 일어나면 돼요, 미스터 챙 만나는 일보다 더 중요한일이 어디있어요.”
“왜 촬영이 더 중요하지, 그게 당신 직업인데…”
“촬영은 끝났어요, 내일이면 우린 우크라이나로 내려가요.”
“그래 그러면 좀 어려운 부탁인데, 내가 지금 아주 절친한 러시안 브라더와 함께 있는데 그 형이 페트리샤 열렬한 팬이거든 그래서 한번 보고 싶다는데 어떻게…”
말을 하다보니 좀 이상했다. 꼭 빌리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 거간꾼 노릇을 하는것 같기도 하고 또 페트리샤가 어떻게 생각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이쪽으로 오라고 해, 내가 단단히 대접할께.”
보로이가 잔뜩 초조한 표정으로 옆에서 채근댔다.
“이리 올 수 있냐고 하는데, 어때?”
“미스터 쳉은 나 보고 싶지 않고 브라더란 분만 보고 싶어해요?”
“아니 나도 보고싶지.”
“그래요, 그럼 갈께요, 잠깐만요,”

페트리샤가 선선히 나왔다. 잠시후 페트리샤는 지금 같이있는 베티라는 동료와 함께 오겠다고 했다. 이쪽에서 레스토랑으로 리무진을 보내기로 했고 이반이 보로이의 눈 독촉에 황급히 리무진을 타고 떠났다.
보로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집안을 정리해야 한다고 하녀들을 불러 뭐라고 떠들어 댔고 자신도 방에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 입고 나왔다. 보로이의 순진한 일면을 보면서 빌리는 웃어야 했다. 그러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페트리샤에게 보로이가 러시아 여인들 대하듯 무레한 짓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였다.
이반이 없었기에 손짓 몸짓을 써가며 보로이의 짧은 영어실력에 맞춰 의사 소통을 해야 했다. 그러자니 오히려 체면치레나 빙빙돌리는 수사 없이 단호하게 의사를 전달 할 수 있었다.
빌리가 보로이에게 다 알만한 사람들이니까 걱정은 안하지만 페트리샤나 그 친구를 오늘안에 어떻게 해볼려고 무례하거나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된다고 하자 보로이는 동생이 나를 아직 모른다고 하면서 자신은 아름다운 여자를 보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즐거워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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